원래대로라면 1월 21일에는 발표가 났어야 할 JLPT 성적이 계속 안 나오다가 드디어 31일인 오늘 공개가 되었다.
가채점 결과는 초록 137, 파랑 115 정도로 안정권이었지만 문법과 청해 답이 헷갈리던 게 있어서 기다리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N1은 단기 벼락치기 후기가 거의 없는 데다가, 있어도 이미 N2 정도의 실력을 갖추셨거나 일본 현지에 거주하시는 분들이 쓴 경우가 많았는데, 나처럼 벼락치기에 성공한 케이스도 있음을 이번 기회에 기록해보고자 한다.
물론 이렇게 한다고 합격한다는 보장이 절대로 없으니 이 글만 보고 "아 나도 한달만 벼락치기해야지!" 라고 생각하는 일은 없었으면 한다.
그리고 이미 시험일까지 한달밖에 남지 않아 절망한 분들께는, 당신이 노베이스가 아니고, 열심히 공부를 한다면 이 후기처럼 합격점은 나올 수도 있으니 끝까지 포기하지 말자고 말씀드리고 싶다. 물론 노베이스는 한달 벼락치기를 하려면 N3도 힘들 것이다...
1. 시작 당시 스펙
당연히 노베이스는 아니었고, 나같은 경우 오타쿠 연차가 꽤 오래 쌓인 상태였다. 2012년부터 덕질했으니 12~13년 정도?
"13년이나 덕질하면 누구든 합격하겠다!" 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2018년 기점으로 케이팝, 미국 힙합 쪽으로 관심사가 옮겨갔기 때문에 연차에 비해 딱히 열심히 덕질하진 않았다(위 사진의 청해 점수가 이를 뒷받침한다).
청해
어린 시절 내 덕질의 80%는 노래 감상이었는데, 2012년부터 2014년까지는 보컬로이드 노래를 열심히 들었고, 2015년부터 2018년 정도까지는 일본 힙합을 열심히 들었다.
다만 가사 하나하나 분석하면서 들은 게 아니라 그냥 틀어놓고 멍때리거나 쿠키런 했다. 그래서 정말 쉬운 단어 몇 개 말고는 알아듣는 게 없었다.
2018년부터는 케이팝과 미국 힙합으로 탈주해서 일본어는 가끔 애니 볼 때, 좋아하는 래퍼가 컴백했을 때나 들었다.
일본 힙합은 꽤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다. KOHH, AKLO, AK-69, SALU, Awich, BAD HOP 등등 당시에 뜨던 래퍼들의 노래는 닥치는 대로 다 들었는데 이때 일본어가 어느 정도 습득된 것 같다. 한국어와 1:1 매칭을 시킬 순 없지만 뉘앙스는 파악되는 정도였다.
나머지 20%는 애니였다. 중학생 때까진 두 달에 한 작품 정도 봤고(장편 애니는 몇 달 동안 나눠서 봄) 전부 자막으로 봤다. 성인이 되고 나서는 1년에 한 작품 정도 본 것 같다. 그나마 열심히 본 게 죠죠인데 죠죠는 두 달 걸려 6부까지 다 봤던 거 같다. 애니는 감상까지만 하고 2차 덕질은 별로 하지 않았다.
버튜버는 키즈나 아이 초창기 시절에 몇 번 보고 그 뒤로는 접해본 적이 없다.
일드는 언내추럴이 유명해서 한 번 본 거 말고는 본 적 없다.
게임은 단간론파 한국어 패치해서 했던 거 말고는 일본어 음성이 나오는 걸 한 적은 없는 것 같다.
보컬로이드 노래, 일본 힙합 6년 정도 들음 (가사 안 읽음)
애니는 종종 자막판으로 봄
버튜버, 일드, 게임 X
독해
2012년 초등학생이던 당시에 구몬으로 히라가나, 가타카나를 뗐다. 그러고는 중고등학교 때 제2외국어로 일본어를 선택해 들었고, 대학생 때는 일본어 교양을 들은 게 전부다.
라노벨이나 만화책 원서는 읽어본 적이 없다. 그렇다고 한국어로 된 책을 열심히 읽었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다. 그냥 남들 읽는 만큼 읽었던 것 같다.
그 외에 굳이 따지자면 초등학생 때 보컬로이드 신곡을 최대한 많이 듣고 싶어서 니코동에 죽치고 살았는데 거기서 배운 건 www, 888888, GJ, 草 뿐이었던 것 같다. 코멘트를 달거나 영상을 올린 게 아니기 때문에 얻은 건 별로 없는 것 같다.
초등학교 시절: 구몬으로 가나 배움, 니코동 자주 접속함
중고등학교 시절: 제2외국어 들음
대학교 시절: 일본어 교양 들음
2. 벼락치기를 한 계기
최근 신입 개발자의 취업이 어려워져 일본 취업을 고려하고 있었는데, 일단 어학 성적이 준비되어야 할 거 같아서 무작정 2024년 2회차를 신청했다. 그러고는 10월 말까지 방치했다.
깡이 있어서 이런 건 아니고 공부할 시간이 안 났다.
2024년 중순부터 모 기관에서 현장실습을 시작했는데, 현장실습하면서 토익도 준비하고 졸업 요건도 갖추고 정보처리기사도 따고 포트폴리오도 준비하고 이것저것 하다보니 눈깜짝할 새에 11월이 되어 있었다.
더 미루면 진짜 큰일나겠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시작했다.
3. 벼락치기한 방법
단어 무한 회독 + 한자 공부 + 앙스타
모의고사는 손도 못 댔고 한 달 내내 단어 돌리고 앙스타 플레이하다가(...) 시험장에 갔다.
책은 한권으로 끝내기도 사고 해커스 단어장도 사고 이것저것 사긴 했는데 펼치지도 못했고 "회독 JLPT" 라는 어플과 "일본어 한자암기박사" 라는 책만 봤다.
타임라인
11월 1일 ~ 11월 8일: 회독 JLPT N5~N4 암기
11월 9일 ~ 11월 15일: 회독 JLPT N3 암기
11월 16일 ~ 11월 23일: 한자암기박사 암기 (반도 못 봄), 앙스타 시작(?)
11월 24일 ~ 11월 30일: 회독 JLPT N1 암기 (N2 건너뜀), 앙스타 정주행
상세
에이 아무리 그래도 N3까진 거의 다 알고 있겠지~ 하면서 어플을 켰다가 절망했다.
N5부터 모르는 게 반이었기 때문이다.
회독 JLPT 라는 어플은 사진처럼 단어마다 예문을 제공하는데, 단어도 모르는 게 꽤 많았고 예문은 훨씬 어려웠다. 그나마 사진에 있는 것 정도가 내가 읽을 수 있는 수준이었다. 덕질을 오랫동안 쉬었으니 까먹은 것도 많았다.
첫 일주일은 정말 피를 토해가며 달달달 외웠다.
N5를 완전히 외우고 N4로 가는 식으로 했는데, 1회독 때는 단어만 외우고 단어를 다 외웠으면 2회독부터 예문까지 싹 다 외우는 식으로 했다. 모든 단어가 "알고 있음"으로 체크될 때까지 한 챕터를 반복해서 보고 이걸 챕터별로 여러 번 반복했다.
그렇게 하고 N3을 시작하니까 오히려 N3부터는 조금 편하게 읽을 수 있었다. 둘째주는 그래도 조금 덜 힘들게 외웠던 거 같다.
그러다가 셋째주에 N2를 시작하고 또 절망했다. 챕터가 수십개인데 한 챕터에 세 시간씩 걸리는 걸 보고 (물론 다 외울 때까지 무한 회독을 하기는 했다) 이렇게 하다간 N2도 못 보고 시험장에 들어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예전에 사둔 한자암기박사 책을 보기 시작했다. 1권만 보려고 했는데 읽다보니 N1은 2권까지 다 봐야 할 거 같아서 2권도 추가로 구매했다. 한자암기박사는 주제별로 한자 3~7개 정도를 엮어서 정리해둔 게 좋았다.
한자암기박사는 출판사에서 영상을 만들어놓은 게 있어서 책 사기 싫으면 그냥 유튜브 봐도 된다. (링크)
한자암기박사는 끝까지는 못 봤고 그냥 책을 넘기다가 관심가는 주제가 있으면 그 주제에 있는 한자, 음독, 훈독, 단어까지 싹 다 외우려고 했다. 1권과 2권을 합쳐서 약 800개의 주제가 있는데 한 100개 정도를 저렇게 외운 거 같고... 200개 정도는 한자랑 뜻 매치까지는 되게 외웠다. 나머지는 그냥 못 외웠다.
그리고 이때 한자 외우다가 멘탈이 다 털려서 좀 편하게 공부하자는 생각에 앙스타를 시작했다. Basic을 설치해서 그냥 메인 스토리 1부 1장 스크립트만 여러 번 읽었는데 은근 한자암기박사에서 외웠던 게 많이 나와서 공부가 됐던 것 같다.
왜 딴 것도 아니고 앙스타를 했냐면 공부를 위해 최대한 스크립트가 심오한 일본 서브컬처 게임을 찾아다녔는데 그런 쪽으로는 앙스타가 좋대서(?) 무작정 시작했다. 추천해주신 지인분이 내가 앙스타를 하는 동안 옆에서 많이 도와주셨다. 거의 모든 대사마다 모르는 단어가 한두개씩 나와서 계속 이건 무슨 뜻이냐고 질문드렸던 것 같다.
그래도 이 정도 보고 다시 회독 JLPT 어플을 보니 예전보단 읽히는 게 많이 생겼다.
문제는 이제 시험이 일주일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너무 급했던 나머지 N2를 통째로 스킵하고 바로 N1을 외우기 시작했다.
개발자분은 스킵하지 말고 꼭 다 외우라고 하셨는데 죄송합니다... N2까지 봤다면 몇 점 더 올라갔을 수도 있을 것 같다.
N1은 N5~N3 때처럼 달달 외우진 못했고 그냥 눈에 바르다시피 봤던 것 같다. 머리에 안 들어와도 그냥 계속 쳐다봤다.
그 와중에 앙스타 스토리는 계속 열심히 읽었다. 한 스크립트를 10번 가까이 읽으니 적어도 그 안에 나오는 한자랑 단어는 숙달이 되었다.
그렇게 전날까지 난 앙스타를 했다. 사실 이틀 전부터는 멘탈이 다 나가서 단어도 설렁설렁 봤고 앙스타 스크립트만 계속 반복해서 읽었다.
4. 시험 당일
시험 당일이 되었다. 준비물은 수험표, 연필, 신분증 정도였던 것 같다. 연필은 HB라고 명시되어 있긴 했는데 다른 걸 들고가도 상관은 없는 듯 했다(혹시 몰라 HB로 가져가긴 했었다).
시험은 독해 > 청해 순이었는데 이걸 시험 당일에 알았다. 그냥 토익처럼 듣기 먼저 할 줄 알았는데 독해 시험지부터 나눠주셔서 당황했다.
처음 독해 시험지를 받고 나서 어휘를 보는데, 천만다행으로 어휘에서 반은 읽혔다. 한자를 따로 공부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휘를 자신있게 풀고 문법으로 갔는데... 문법은 공부한 적이 없으니 당연히 아는 것도 없다. 그냥 느낌 가는 대로 찍고 독해로 넘어갔다.
독해는 정말 신기한 게 막히는 것 없이 모든 글이 술술 읽혔다. 그냥 수능 국어 지문 읽는 것처럼 읽혔다.
독해 파트에서는 이때까지 단어로 고생했던 게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만 일본 특유의 빙빙 돌려 말하는 정서 때문에 문제의 의도가 헷갈리는 게 한 두개 정도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다 풀고 나니 30분이 넘게 남아서 검토만 5번 가까이 했다.
청해는 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는데도 굉장히 쉽다는 느낌을 받았다(이번 시험이 전반적으로 물시험이라는 얘기도 있었다). 사실 문법 때문에 어휘문법 파트가 과락난 줄 알고 청해는 제대로 듣지도 않았다. 그냥 시험지에 낙서하다가 들리는 대로 체크했는데 나중에 채점해보니 단문 빼고는 다 맞았다.
5. 소감
죽는 줄 알았다. 9시부터 6시까지 근무인데 7시에 일어나서 한시간 반 정도 단어 보고, 점심시간 한시간 반 동안 단어 보고, 6시에 퇴근하면 밥 먹고 7시부터 1시까지 단어만 외웠다. 밥 먹는 순간에도 외웠고 씻을 때도 휴대폰에 단어 띄워놓고 외웠다. 근무할 때도 오늘치 일을 다 해서 할 게 더 없으면 몰래 어플로 단어 외우고 그랬다.
하루 순공 시간이 최소 9시간 정도였던 것 같은데 공부하다가 죽는다는 게 이런 기분이구나 싶었다.
시험 끝나고는 한동안 잠만 잔 것 같다.
그래도 133점이라는, 벼락치기 치고는 나름 높은 점수가 나와서 정말 만족한다.
처음에는 N5도 안 읽혀서 당황했는데 독해가 만점이 나온 것도 참 신기하다.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거니까 뿌듯하고, 벼락치기는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다.
뭐 어찌저찌 어학 성적은 준비가 됐으니 이제 일본 취업도 본격적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첫 관문은 이렇게 통과했다. 다만 벼락치기의 여파로 지금까지 공부한 걸 꽤 많이 까먹었기 때문에 다시 천천히 공부해야 할 것 같긴 하다...